250420 동수교회 주일 예배 실황 영상 "주님 부활하셨다! 주님 살아계신다!"

작성 동수교회
날짜 2025-04-19
설교한 날
2025/04/20 일
성경 본문
누가복음 24:1-12
설교
주학선 목사

<온라인 주보>

온라인 주보를 보기 원하시는 분은 <온라인 주보>를 클릭해주세요.

주님 부활하셨다! 주님 살아계신다! (누가복음 24:1-12)

1. 환영과 찬양

◾ 기쁨으로 서로 환영하며 축복합니다. 잠시 교제의 시간을 가집니다. 

◾ 찬송 164장 ◾ 복음송 하나님의 독생자

◾ 기도 맡은이 혹은 합심기도

2. 먼저오심 

1) 지난 한 주간의 이야기(행복, 고마움, 힘듦)를 서로 나눕니다.

2) 지난 한 주간 어떤 기도를 했는지 서로 이야기합니다.

3. 만나주심

◾ 성경본문 : 누가복음 24:1-12

안식일이 지난 첫날 곧 일요일 새벽, 향품을 준비한 여인들이 무덤을 찾았습니다(1절). 이들은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다른 여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손에는 예수님의 시신에 사용할 향료가 있었습니다. 여인들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한 깊은 슬픔과 사랑의 마음으로 무덤을 찾아 왔습니다.

빈 무덤

그런데 놀랍게도 무덤은 열려 있었습니다. 무덤을 지키던 병사들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여인들은 놀람과 두려움으로 무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있어야 할 예수님의 시신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의 시신은 어디로 사라졌단 말입니까? 놀란 여인들 앞에 갑자기 눈부신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나타나서 말합니다. “어찌하여 너희들은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찾고 있느냐? 그분은 여기에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다.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들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해 보아라.”(5-6절) 그분이 살아계시다는 것입니다.

빈 무덤은 부활 신앙의 문입니다. 부활 신앙은 빈 무덤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살아나셨고, 이제는 새로운 방식으로 제자들을 만나십니다. 어디서나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빈 무덤은 주님의 부재의 공간이 아니라, 부활 생명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빈 무덤은 ‘그분이 살아나셨다’라는 증언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손의 못 자국을 보고 손가락으로 못 자국을 만져보고, 손을 예수님의 옆구리에 넣어보고 믿겠다는 도마에게(요 20:25) 예수님은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요 20:2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빈 무덤은 부활 신앙의 훈련장입니다.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부활의 주님을 믿는 것이 진정한 신앙입니다. 그 빈 무덤에서 생명의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무덤 같은 절망의 자리, 무덤 같은 아픔과 실패와 상처와 고통의 자리가 부활하시고 살아계신 주님의 역사와 변화와 승리의 빈 무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살아계신 주님, 부활하신 주님이 함께하실 때 우리 인생의 무덤이 부활하신 주님의 임재로 가득한 거룩한 성소로 변화되기를 축복합니다. 무덤 같은 인생이 부활의 주님이 임하신 성전의 인생으로 변화되기를 축복합니다. 빈 무덤의 신앙은 아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은 이미 일하고 계심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기억하라

천사들은 계속 말하였습니다.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들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해 보아라. ‘인자는 반드시 죄인의 손에 넘어가서, 십자가에 처형되고,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야 한다’고 하셨다.”(6-7절) 이 말씀을 들은 여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였습니다(8절). “기억하라”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건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기억’이란 기억을 통하여 현재의 삶을 재해석하며, 현재의 삶에 구체적인 결단과 행동으로 이끄는 것을 포함합니다. 여기서 “기억하라”는 정확하게는 “기억나게 되라”는 뜻으로 외부의 어떤 사건과 말씀을 통해 성령 안에서 그것을 기억하여 삶 속에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억은 성령님의 사역과 연결됩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며,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요 14:26) 기억은 성령의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는 영적 깨달음의 통로입니다. 신앙은 지식의 저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 안에서 삶 속에 새롭게 해석하고 적용하는 기억의 실천입니다.

천사들은 예수님이 예고하셨던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말씀을 그대로 다시 전하면서 ‘기억하라’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의 말씀과 연결될 때 놀라운 은혜가 드러납니다. 말씀을 믿는 것이 곧 부활을 믿는 시작입니다. 왜냐하면, 부활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신 그 예언의 성취이기 때문입니다. 기억은 신앙의 깨달음과 해석의 열쇠가 됩니다. 그러므로 기억은 예배의 중심입니다. 예수님은 성찬을 제정하시면서 “너희는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 22:1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도 ‘기념하다’는 단순히 기억하고 생각해내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십자가의 구속 사건을 현재의 삶 속에서 다시 살아가는 예배적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기억은 예배이고, 예배는 부활의 말씀과 사건을 계속 기억하며 사는 믿음의 삶의 행동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깨닫게 될 때 생각과 삶이 바뀝니다. 여인들은 비로소 그 말씀을 기억하고, 살아 계신 주님께로 마음의 시선을 옮깁니다. 말씀의 기억이 부활 신앙의 시작입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것은 결국 성령 안에서 부활의 은혜와 능력을 새롭게 기억해내는 삶이 됩니다. 기억은 믿음의 시작이며 실천입니다. 말씀을 기억하는 것이 부활을 사는 길입니다. 우리는 고난과 절망 속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말씀을 기억하고 붙드는 것입니다. 기억할 때 우리는 매일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게 합니다. 사탄은 우리가 말씀을 잊게 만들고, 감정과 경험에만 집중하게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말씀을 기억함으로 현실을 믿음으로 해석하고, 영적으로 승리합니다.

놀람

여인들은 무덤에서 돌아와 열한 제자와 모든 사람에게 이 일을 알려주었습니다. 사도들은 어처구니없는 말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달랐습니다. 제자들은 인간의 합리성과 상식으로 인해 부활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여인들의 말을 확인하려고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그가 본 것은 빈 무덤과 세마포 뿐이었습니다. 그는 이 모든 일을 보고 “놀랍게” 여겼습니다. 베드로가 “세마포만 보았다”라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아직 보지 못했음을 말합니다. 무덤은 비어 있었고 남은 것은 세마포 뿐이었지만, 이는 부활의 증거였습니다. 세마포는 육안의 증거가 아니라 믿음을 요청하는 흔적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무덤으로 ‘달려간’ 제자였습니다. 베드로는 의심하면서도 확인하고 싶은 마음으로 달려갔습니다. 믿음은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달려가는 과정입니다. 아직 믿지 못하지만, ‘믿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베드로가 남과 다른 점입니다. 이것은 부활 신앙에서 매우 중요한 시작입니다. 부활의 믿음은 의심 없는 상태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달려가서 확인하려는 발걸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세마포가 놓인 것을 보고 “놀랍게” 여겼다는 말은 깊이 놀라고 경이로움을 느꼈다는 뜻입니다. 이는 단순한 ‘감정적인 놀람’ 이상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현상 앞에서 멈추어 사유하고 내면적으로 요동치는 반응을 뜻합니다. 베드로는 그 자리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다”는 고백을 하지 않습니다. 베드로의 놀람은 아직 믿음은 아니지만, 부활의 신비 앞에 마음이 흔들리고 열리는 시작입니다. 성경을 보면 놀람은 믿음으로 이끄는 통로입니다. 놀람은 일어난 사건을 통해 초월적인 존재이신 하나님을 향해 눈을 뜨게 합니다. 놀람의 순간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일상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상하게 여겨지는 순간을 놓치지 마십시오. 베드로는 확신이 있어서 무덤을 찾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믿음과 의심 사이에서, 주님에 대한 사랑과 갈망으로 달려갔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아무것도 없음을 보고 놀랐고, 그렇게 부활의 믿음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빈 무덤이 있습니다. 대답이 보이지 않는 문제들, 하나님의 뜻이 숨겨진 사건들, 실패와 좌절, 상실과 아픔의 무덤이 있습니다. 우리는 무덤을 직면하면서 놀랍니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놀람과 두려움과 이상함이 부활의 주님을 향한 믿음의 문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은혜의 경험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무덤을 넘어 생명과 부활 승리의 길로 나아갈 것입니다. 

새로운 해석

부활 신앙은 새로운 해석의 시작입니다. 부활은 단지 죽음을 이긴 사건이 아니라, 모든 삶을 새롭게 해석하게 하는 복음의 능력입니다. 부활 신앙은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해석하는 렌즈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요 11:25-26) 예수님은 부활과 생명 그 자체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것은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부활의 믿음 없이 예수님을 믿고 따를 수 없습니다. 성도는 부활의 백성입니다. 교회는 부활의 공동체입니다. 여인들이 무덤을 찾았을 때 천사들이 말하였습니다. “어찌하여 너희들은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찾고 있느냐?”(5절) 이 질문은 그들의 인생과 신앙의 해석의 틀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 틀을 완전히 뒤집어 엎는 새로운 패러다임입니다. 부활은 신앙으로 인생을 해석하는 틀의 전환입니다. 천사들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하게 해주었습니다. “인자는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야 한다.”(7절) 예수님은 부활이라는 새로운 해석의 틀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패배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승리임을 드러내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부활의 믿음을 가질 때 우리의 인생 해석은 바뀝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생명의 문이 됩니다. 실패는 절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훈련이 됩니다. 고난은 형벌이 아니라 영광의 과정이 됩니다. 침묵은 부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심입니다. 기다림은 낭비가 아니라 은혜의 통로가 됩니다. 부활 신앙은 인생 해석의 차이를 만들어냅니다. 같은 상황을 전혀 다른 길로 이끌어갑니다. 해석의 틀이 바뀌지 않으면 변화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 자라고 깊어질 수 없습니다. 부활의 믿음은 단지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새로운 인생의 눈으로 모든 일을 새롭게 해석하며 승리와 영광의 세계로 달려가게 합니다. 우리의 실패와 좌절을 새로운 기회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부활 신앙은 역사를 해석하고, 고난 뒤에 숨은 하나님의 섭리를 드러내며 그 의미를 바꿉니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무덤’을 우리 인생의 결론으로 볼 것입니다. 하지만 부활의 신앙 안에서 무덤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의 시작입니다. 해석이 바뀌면 인생이 달라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 부활하셨습니다. 어둠을 이긴 주님 안에서 빛의 삶을 살며 승리의 길을 걸으십시오. 부활의 믿음으로 인생을 새롭게 바라보며 고난과 문제를 새롭게 해석하십시오. 죽음 너머 생명의 승리를 바라보십시오. 사랑으로 모든 것을 이기십시오. 말씀으로 다시 일어서십시오. 부활의 소식을 널리 선포하고 전하십시오. 성령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살아계신 부활의 주님을 보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부활의 능력으로 일어서기를 축복합니다.

4. 다듬으심 

1) 주일 예배를 통해 경험하고 감동받거나 느낀 것은 무엇인가요?

2) 우리는 고난과 절망 속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말씀을 기억하고 붙드는 것입니다. 내가 기억하고 붙들고 있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자유롭게 나눠봅시다.

3) 예수님은 부활과 생명 그 자체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것은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부활의 믿음 없이 예수님을 믿고 따를 수 없습니다. 부활의 백성인 성도는 부활을 믿고 따르며 전해야합니다. 부활의 기쁜 소식을 누구에게 어떻게 전하시겠습니까? 

4) 앞으로 한 주간 삶 속에서 말씀을 어떻게 적용할지 구체적으로 한 가지만 나눕니다.

5. 들어쓰심

1)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기 위한 결단과 헌신의 기도하기

2) VIP(전도대상자), 개인, 가정, 교회, 선교, 나라를 위한 합심, 중보기도

6. ◾ 가 정 : 말씀나눔

 ◾ 소그룹 : 말씀나눔/ 소식나눔/ 헌금찬송 무덤에 머물러 / 주기도문

7. 금주의 암송구절 : 금주의 암송구절을 함께 외웁니다.

 ◾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을 그 날로 족하니라. (마태복음 6:33-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