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환영과 찬양
◾ 기쁨으로 서로 환영하며 축복합니다. 잠시 교제의 시간을 가집니다.
◾ 찬송 33장 ◾ 복음송 오직 예수 뿐이네 ◾ 기도 맡은이 혹은 합심기도
2. 먼저오심
1) 지난 한 주간의 이야기(행복, 고마움, 힘듦)를 서로 나눕니다.
2) 지난 한 주간 어떤 기도를 했는지 서로 이야기합니다.
3. 만나주심
◾ 성경본문 : 마가복음 11:1-11
이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준비되고 계획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입성을 위해 제자들에게 맞은편 마을에서 새끼 나귀 한 마리를 풀어 끌고 오도록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쓰신다’는 표현은 ‘주님께 필요하다’라는 뜻입니다. 이 표현에는 예수님의 동역과 동반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제자들은 나귀 새끼의 등에 겉옷을 걸쳐서 안장처럼 꾸몄고, 예수님은 그렇게 그 위에 올라타시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십니다. 사람들은 들에서 벤 종려 나뭇가지를 길에 펼치기도 하고, 흔들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복되도다!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호산나’는 히브리어로 ‘호쉬아 나’인데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호산나’라는 표현이 유대인들의 종말론적인 희망과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곧 호산나는 이스라엘의 회복과 다윗 통치의 회복을 열망하는 외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군중들이 ‘호산나’와 함께 ‘다윗의 나라’를 외친 것은 자연스럽고 분명한 군중들의 열망이 담긴 환호성이었습니다.
술렁이는 예루살렘
예루살렘은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곳입니다. 복음서에서 예루살렘은 매우 중요하고 특별한 의미를 지닌 곳입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 자신이 별세하실 곳으로 예언하신 곳이기 때문입니다.(눅 9:31)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곧 예수님의 죽음과 직접 연결되는 매우 중요한 순간임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긴장감이 감도는 사건이었습니다. 수많은 군중은 예수님의 입성으로 놀라운 혁명과 변화가 일어날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군중들이 술렁이고 있었습니다. 때는 유월절이 시작되는 주간이었기에 많은 순례자의 물결로 예루살렘은 혼잡했습니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유월절은 사회정치적으로도 이스라엘이 어떤 방향으로 폭발할지 모르는 위험한 시기였습니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정치적인 반란으로 큰 폭동이 일어날 수도 있고,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 혼란에 빠질 위험이 항상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유월절을 맞아 빌라도 총독도 예루살렘 성에 들어와 비상사태를 대비하고 있었으며, 대제사장과 종교지도자들은 세심하게 상황을 살폈습니다.
나귀를 타신 왕
이렇게 예민한 상황 가운데 열렬한 유대인들과 가난한 순례자들 사이로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환호하며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사람들이 호산나를 외친 것은 왕을 향한 환호성이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소서!” 민중들은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어린이도(마 21:15) 기뻐하며 외쳤습니다. 모두 환성을 질렀습니다. “다윗의 나라여 높은 곳에서 호산나!”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왕!”(요 12:13)으로 마태복음에는 “다윗의 자손”(마 21:9)으로 불리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이스라엘의 왕의 입성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으로, 다윗의 나라를 통치하실 왕이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모습은 왕으로 부르기에는 영 어울리지 않습니다. 기우뚱거리는 나귀 새끼를 타고 성으로 오르시는 예수님에게는 왕다운 모습이 없습니다. 당시에 익숙한 왕과 장군의 예루살렘 입성은 언제나 위엄이 넘치는 행진이었습니다. 그런데 왕이신 예수님의 입성은 정말 꼴불견입니다. 도대체 어느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한단 말입니까? 역사학자 닉 페이지는 이러한 예수님을 가리켜 예수님은 세상 왕의 모습을 정교하게 패러디하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모습은 진정한 메시아를 드러내는 상징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일은 이미 오래전에 예언된 말씀을 이루시는 놀라운 행동이었습니다. “도성 시온아, 크게 기뻐하여라. 도성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는 공의로우신 왕, 구원을 베푸시는 왕이시다. 그는 온순하셔서, 나귀 곧 나귀 새끼인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슥 9:9) 이어 스가랴 예언자는 나귀를 타고 오시는 왕이 어떤 왕인지를 이렇게 선포하였습니다. “내가 에브라임에서 병거를 없애고, 예루살렘에서 군마를 없애며, 전쟁할 때에 쓰는 활도 꺾으려 한다. 그 왕은 이방 민족들에게 평화를 선포할 것이며, 그의 다스림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유프라테스강에서 땅 끝까지 이를 것이다.”(슥 9:10)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전쟁과 정복의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정복자나 권력의 왕이 아니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저 위에는 로마 권력이 드러내는 폭력과, 폭압과, 부유함과, 독점권의 본거지에 대항하며 초라하고, 힘이 없고, 가난한 평화의 왕으로 입성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예언의 성취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면서, 어떤 선언보다도 강력하게 ‘하나님의 나라’와 참 메시아의 희망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너의 왕은 누구냐?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는 조금도 세상의 제왕적인 모습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에서는 누구도 왕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것이 왕이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선포하신 복음 곧 하나님의 나라의 왕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모습은 우리에게 큰 물음을 던집니다. ‘너의 왕은 누구냐?’ 말을 타고 위풍당당하게 칼을 휘두르는 세상의 권력자 황제가 너희의 왕이냐? 아니면 나귀를 타고 볼품없이 입성하시는 예수님이 너의 왕이냐? 누구를 왕으로 선택하겠느냐? 세상의 권력자냐 아니면 하나님 나라의 메시아냐? 너는 어느 편에 서 있느냐? 세상이냐, 그리스도냐?
우리는 사순절의 십자가의 길을 따라 예수님과 함께 걸었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세례를 받으시고 시험을 이기신 후 첫 복음을 외치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놀라운 기적과 복음의 역사를 행하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수난을 당하실 것을 밝히시며 예고하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성전 뜰에서 채찍을 휘두르시며 성전을 정화하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광야의 구리 뱀처럼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말씀하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 많은 열매를 맺듯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놀라운 구원과 생명의 열매를 맺으실 십자가의 구원을 선포하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가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과 함께 우리는 사순절의 마지막 여정을 걷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여정 가운데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보여주시고, 선포하신 구원의 길을 분명하게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길은 언제나 같은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한결같이 오직 한 방향으로 걸으셨습니다. 비천한 말구유에 태어나심부터 시작하여 마침내는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예수님은 점점 낮은 길로 걸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길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빌 2:5-8) 이렇게 예수님은 점점 낮아지는 십자가와 사랑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의 왕은 누구냐? 나귀를 탄 나를 너의 왕으로 믿고 따르겠느냐? 이것이 왕의 길이다. 이 길을 너도 걷겠느냐? 너는 나와 함께 가겠느냐?
왕의 길을 따라
예수님은 오직 한 가지 목적을 위해 오셔서 일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바로 이 목적을 위해, 이 사명을 위해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이 목적을 향하여 길을 걸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로서의 사명을 단 한 번도 놓치신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사명의 끝에는 십자가가 서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명을 이루시려고 예루살렘으로 오르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사명의 길입니다.
이 시간 우리는 ‘나의 왕은 누구이며, 나는 그 왕의 길을 따르는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 왕의 길을 걷고 있습니까? 세상이 아닌 주님을 왕으로 따르고 있습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시고 구원하여 주신 그 생명의 길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까? 우리의 왕 그리스도께서 이끄시는 왕의 길은 넓지 않습니다. 인기가 없습니다.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우리 왕의 길은 생명의 길입니다. 소망의 길입니다. 승리의 길입니다. 우리는 이 믿음으로 사순절의 마지막 한 주간을 주님을 따르며 주님과 함께합니다.
우리의 왕 예수님의 길은 평화를 이루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가 화목하도록, 또한 우리가 서로 화목하며 사랑하도록 십자가에서 화목의 제물로 달리시기를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이 우리 사이를 화해시키셨습니다. 그분은 벽을 허무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몸을 제물로 드리셔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완전한 화해를 이루셨습니다.”(엡 2:14-15) 이것이 우리가 따라야 할 왕의 길입니다. 왕의 길을 따르는 우리는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호산나 찬양을 부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용서와 화해의 삶을 살아 평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겸손하게 나귀를 타신 우리의 왕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며 호산나를 크게 외쳐 부릅시다.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생명을 얻은 우리는 주님을 높이고 우리의 왕 되심에 감사하며 오직 그분께 찬양과 경배를 드립시다. 호산나, 주 예수님 구원하소서. 주님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호산나 영광 받으소서. 아멘.
4. 다듬으심
1) 주일 예배를 통해 경험하고 감동받거나 느낀 것은 무엇인가요?
2) 예수님은 전쟁과 정복의 메시아가 아닌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어떤 왕으로 고백하며 따르고 있는지 자유롭게 나눠봅시다.
3) 우리의 왕,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은 평화를 이루며 서로 사랑하는 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진정한 용서와 화해, 사랑을 실천해야 할 대상은 누구입니까?
4) 앞으로 한 주간 삶 속에서 말씀을 어떻게 적용할지 구체적으로 한 가지만 나눕니다.
5. 들어쓰심
1)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기 위한 결단과 헌신의 기도하기
2) VIP(전도대상자), 개인, 가정, 교회, 선교, 나라를 위한 합심, 중보기도
6. ◾ 가 정 : 말씀나눔 ◾ 소그룹 : 말씀나눔/ 소식나눔/ 헌금찬송 142장/ 주기도문
7. 금주의 암송구절 : 금주의 암송구절을 함께 외웁니다.
◾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언 1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