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환영과 찬양
◾ 기쁨으로 서로 환영하며 축복합니다. 잠시 교제의 시간을 가집니다.
◾ 찬송 39장 ◾ 복음송 주 선한 능력으로 안으시네
◾ 기도 맡은이 혹은 합심기도
2. 먼저오심
1) 지난 한 주간의 이야기(행복, 고마움, 힘듦)를 서로 나눕니다.
2) 지난 한 주간 어떤 기도를 했는지 서로 이야기합니다.
3. 만나주심
◾ 성경본문 : 빌립보서 3:17-21
그리스도를 본받아
신앙생활은 본받는 삶입니다. 바울은 이미 빌립보서 2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하면서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의 중요함을 강조했습니다. 이제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간곡하게 권고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다함께 나를 본받으십시오.”(17절) 바울은 고린도 교회와 데살로니가 교회에도 똑같은 말씀을 하였습니다.(고전 4:16, 살전 1:6) 디모데에게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 뜻은 … 앞으로 예수를 믿고 영생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본보기로 삼으시려는 것입니다.”(딤전 1:16) 이 말씀은 바울의 목회 철학의 한 면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성도와 사역자는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한다”라는 신념입니다. 바울은 앞에서 본이 되신 그리스도의 마음을 설명한 후에 에바브로디도와 디모데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본받았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을 본받으라고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온전하기에 본받으라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을 본받으라는 것일까요?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여러분은 나를 본받는 자가 되십시오.”(고전 11:1)라고 말하였습니다. 바울이 자신을 본받으라고 한 것은 곧, 자기가 그리스도를 본받으려는 그 모습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완벽하지는 않지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을 가장 귀한 것으로 여기는 자신의 태도를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바울 자신은 성도들이 본받아야 할 궁극적인 모범이 아니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본받아야 할 분임을 전하는 자임을 말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미 자신이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빌 3:10)임을 밝혔습니다. 더 나아가 바울 주변에는 바울을 신뢰하고 따르면서 바울을 본받는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우리를 본받아서 사는 사람들을 눈여겨보십시오.”(17절) 라고 말합니다. 신앙은 본받음을 통해 계속 전수되고 이어져야 합니다. 본받음이 없으면 신앙공동체의 생명력은 끊어집니다. 그리스도 예수에서 바울로, 바울에서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로 이어진 복음이, 이제는 빌립보의 모든 성도에게로 퍼져 나가 그들의 신앙과 사역과 삶이 계속 이어져야 함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음은 우리의 자녀와 믿음의 새로운 세대에게 그리스도 신앙이 계승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먼저 믿은 우리가 자녀와 신앙의 다음 세대에게 그리스도를 본받고 있음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신앙은 삶을 보여줌으로 전수됩니다. 자녀들은 보며 배웁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본받을 사람들을 “눈여겨보라”라고 합니다. 눈여겨본다는 것은 자세하게 관찰하고 깊이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좋다고 따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의 진면목을 관찰하고 따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순례길에서 앞서가는 훌륭한 성도들을 주의 깊게 보면서 본받고 따라야 합니다.
교회는 이렇게 서로 본받고 따름으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거룩한 생명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교우들을 보면서 누구에게서든지 본받을 점이 있다는 믿음으로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그릇되고 부정하고 거짓된 것은 반면교사로 삼으면 됩니다. 만약 우리의 관계가 형식적이고 피상적이라면 서로 본받을 점을 찾을 수가 없고 그리스도를 닮아가기가 어렵습니다. 친밀한 관계 안에서 우리는 서로를 알고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속회와 소그룹이 영적 성장의 중요한 요람이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원수들
이제 바울은 자신의 모범과는 반대로 사는 사람들에 대해 가슴 아프게 말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여러 번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18절) 그들은 공동체 안에 있는 사람들로서 은혜로 받은 복음을 저버리고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가치관은 “배를 자기들의 하나님으로 삼고, 자기들의 수치를 영광으로 삼고, 땅의 것만을 생각”(19절)하는 것입니다. ‘배(위장)를 신으로 삼는다’라는 것은 음식과 연관된 표현으로 탐욕으로 타락한 방탕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수치”는 부끄러운 것이란 의미로 할례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바울은 할례가 전혀 무가치한 것이며, 결국 멸망에 이를 때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땅의 것이라고 평가합니다.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자들은 겉으로 보이는 세속적인 만족과 자랑거리를 영광으로 생각하지만, 이것이 수치스러운 줄도 모른 채 자기들의 욕망에 빠진 자들입니다. 바울은 “그들의 마지막은 멸망”이라고 선언합니다. 현실에서 탐욕과 자기만족의 방탕으로 살지만, 종말에 그들은 주님의 심판 앞에서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의 탐욕과 영광은 멸망이 될 것이며,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거하는 자에게는 “부르심의 상”과 승리의 면류관이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빌 3:14, 4:1) 그리스도를 온전히 사랑하며 따르는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마지막에 이루실 승리와 영광의 상을 바라봅니다. 우리의 믿음이 세상에서는 부조리하고 외면당하고 어리석어 보이지만, 우리는 복음에 합당한 삶을 흔들리지 말고 살아내야 합니다.
하늘에 있는 정부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곳으로부터 우리는 구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20절) 그리스도인은 하늘을 바라보고 삽니다. 성도의 중요한 정체성의 하나는 이 땅에 살지만, 하늘의 시민권자로서 하늘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오실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립니다. “시민권”이라는 단어는 정부, 정치 조직, 식민지 등의 뜻을 포괄하는데, 우리는 20절을 ‘우리의 정부는 하늘에 있습니다’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 단어를 교회라는 단어와 기능적으로 같은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바울은 이 단어를 사용함으로 교회는 세상의 이익 집단이나 사적인 모임이 아니며, 당시 세속 정부인 로마 제국에도 속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은 하늘의 정부로부터 “구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구주”는 당시 정치·군사적인 용어로서 적군에게 점령당한 백성을 구원할 장군의 이미지를 담고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 로마의 황제는 곧 구원자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구주라는 선언은 세상 정부나 로마 황제나 군대의 장군이 문제를 해결하고 구해 줄 자가 아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종말적인 하나님의 구원의 완성과 그리스도의 영광을 사모하고 기다립니다.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림이 성도의 충성입니다.
하늘의 가치
바울은 빌립보서 4장에서 자신과 함께한 동역자들을 소개하면서 “그들의 이름은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빌 4:3)라고 말합니다. 하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그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상이 아닌 하늘의 정부의 시민은 호적이 하늘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고 예배하는 우리의 이름은 하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의 시민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식민지이며, 그리스도인은 하늘의 시민권자이기에 세상의 법과 가치를 따르는 십자가의 원수들과는 달리 하나님 나라의 법을 따라 삽니다. 빛나는 하늘의 가치를 세상에 드러냅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은 하늘의 것을 추구합니다. 세상의 가치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기를 거부합니다. 오직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에 자신을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삽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우리는 하늘의 시민권자입니다. 우리의 정부는 하늘에 있습니다. 하늘의 것을 추구하십시오. 하늘의 시민은 땅의 것들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힘과 자기의 뜻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자기주장을 하지 않습니다. 자기 욕망을 채우려 하지 않습니다. 하늘의 시민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거룩하고 탁월한 하늘의 가치를 따라 삽니다. 십자가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믿습니다. 십자가의 사랑과 희생의 가치를 추구합니다. 이 땅에 살지만, 이 땅에 속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닮는 자기희생적인 사랑과 겸손을 추구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고전 10:31). “사랑을 추구하십시오.”(고전 14:1)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심을 받았으니,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하십시오.”(골 3:1)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과 거룩함을 추구하십시오.”(히 12:14) 우리는 하늘에 속한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빛나는 삶
하늘에 속한 성도는 하늘에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립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중심에는 ‘기다림’이 있습니다. 바른 믿음을 가진 성도는 기다립니다. 기다림은 믿음의 핵심 요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세주이심을 고백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은 성도는 구원의 완성을 향하여 달려갑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구원을 완성하실 것입니다. 성도의 기다림은 가만히 앉아서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기다리는 사람은 현재의 삶이 다릅니다. 우리가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린다면 우리는 오늘을 그냥 보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나라에 살고 있지만, 천국의 시민으로 삽니다. 천국의 시민은 하늘의 것을 추구하며, 하늘의 것을 추구하는 성도는 세상에서 거룩하게 삽니다. 이 세상은 단지 거쳐 갈 곳이 아닙니다. 성도는 세상에 빠져서도 안 되지만, 세상을 벗어나서도 안 됩니다.
성도는 “구부러지고 뒤틀린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빌 2:15) 삽니다. 어두운 세상에서 별과 같이 빛나는 삶을 삽니다. 그리스도의 날에 자랑할 수 있도록 생명의 말씀을 굳게 잡습니다.(빌 2:16) 우리는 다시 오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그날을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는 주일만 거룩한 날이 아니라, 일주일이 모두 거룩한 날입니다. 예배의 시간에만 거룩한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삶에서도 거룩합니다. 우리의 가정과 직장과 사회와 나라는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빛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사명의 자리입니다. 우리는 거룩한 삶으로 아직 천국을 모르는 이 땅의 사람들에게 복음의 생명과 구원과 기쁨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의 자녀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뜻을 따르며 오실 주님을 기다립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이 하늘의 가치를 추구하고, 거룩한 행동과 빛의 삶으로 가득한 삶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하늘의 시민권자로 이 땅에서 빛나는 성도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4. 다듬으심
1) 주일 예배를 통해 경험하고 감동받거나 느낀 것은 무엇인가요?
2) 바울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의 중요함을 강조했습니다. 교회는 서로 본받고 따름으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거룩한 생명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믿음의 교우들을 보며 내가 본받아야 할 점은 무엇이 있는지 자유롭게 나눠봅시다.
3) 천국의 시민은 하늘의 것을 추구하며, 하늘의 것을 추구하는 성도는 세상에서 거룩하게 삽니다. 일상의 삶이 거룩하기 위해 내가 해야할 노력은 무엇입니까?
4) 앞으로 한 주간 삶 속에서 말씀을 어떻게 적용할지 구체적으로 한 가지만 나눕니다.
5. 들어쓰심
1)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기 위한 결단과 헌신의 기도하기
2) VIP(전도대상자), 개인, 가정, 교회, 선교, 나라를 위한 합심, 중보기도
6. ◾ 가 정 : 말씀나눔
◾ 소그룹 : 말씀나눔/ 소식나눔/ 헌금찬송 191장/ 주기도문
7. 금주의 암송구절 : 금주의 암송구절을 함께 외웁니다.
◾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런 것들을 막을 법이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5:2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