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623 동수교회 주일 예배 실황 영상 "은혜와 평화가 성도 여러분에게"

작성 동수교회
날짜 2024-06-22
설교한 날
2024/06/23 일
성경 본문
빌립보서 1:1-2
설교
주학선 목사

<온라인 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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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와 평화가 성도 여러분에게(빌립보서 1:1-2)

1. 환영과 찬양

◾ 기쁨으로 서로 환영하며 축복합니다. 잠시 교제의 시간을 가집니다. 

◾ 찬송 36장 ◾  복음송 여기에 모인 우리

◾ 기도 맡은이 혹은 합심기도

2. 먼저오심 

1) 지난 한 주간의 이야기(행복, 고마움, 힘듦)를 서로 나눕니다.

2) 지난 한 주간 어떤 기도를 했는지 서로 이야기합니다.

3. 만나주심

◾ 성경본문 : 빌립보서 1:1-2

나는 누구인가?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예수의 종”이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바울이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과 맺은 친밀하고 깊은 신뢰의 관계를 반영합니다. 굳이 자신을 스스로 사도라고 내세울 필요가 없었습니다. 종이라는 단어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는 우리가 쉽게 추측할 수 있듯이 ‘종’은 그리스나 로마 문화권에서 낮추고 비하하는 언어입니다. 이런 점에서 바울은 자신을 종으로 표현하면서 겸손하게 낮추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바울은 빌립보서 2장에서 신약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리스도 찬미가’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을 취하신” 분으로 묘사합니다(2:7). 바울은 자신을 “예수의 종”이라고 표현함으로 자신은 예수에게 속하였고, 예수의 것이며, 오직 예수를 섬기며, 예수의 뜻을 위해 살고, 예수를 닮으려 함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종”이라는 말은 겸손함과 아울러 자신의 존재와 사명을 드러내는 거룩한 직분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신을 어떤 존재로 규정하느냐?”라는 물음을 마주하게 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 하면서 자신의 위치를 분명히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약 지금 우리가 우리를 잘 아는 누군가에게 이메일을 보내거나 긴 문자를 보낸다면 자신을 누구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그렇게 말할 때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그런 존재라고 인정해줄까요? 우리가 자기 자신의 위치를 알고, 자신이 신앙적으로 누구인지 고백하는 것은 곧 주님과의 관계가 어떠한지를 잘 드러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정으로 자신의 주님이시라면 자신을 예수의 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깊고 친밀한 믿음의 관계를 맺고 산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친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진심으로 따른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우리는 예배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위치와 존재가 분명할 때 우리는 담대하게 믿음의 길을 걸으며 성장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공동 발신자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나”라는 주어로 빌립보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점은 바울은 자신의 편지에 디모데라는 이름을 넣음으로 디모데를 위한 마음을 드러냅니다. 2장에 가면 바울은 빌립보의 성도들에게 디모데만한 사람이 없다고 하면서 디모데는 검증된 사람이라고 말해줍니다(2:19-23). 이처럼 바울은 디모데를 동역자로 인정하였으며, 디모데가 지도력과 권위를 인정받고 훌륭한 지도자로 성장하기를 기대하면서 그를 사랑하였습니다. 또한, 디모데를 빌립보 교회에 보낼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다음 세대와 리더십을 세우며, 그들에게 길을 열어주고 준비케 하는 바울 목회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거룩하고 복된 이름 “성도”

이제 바울은 수신자를 분명하게 기록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살고 있는 모든 성도들과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1:1) 빌립보서의 수신자에 대한 표현 역시 다른 편지들과 좀 다른 점이 있습니다. 빌립보서에서는 교회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작은 로마와 같은 빌립보라는 지역의 특성과 정치적인 면을 고려한 것으로 보입니다. 교회라는 단어가 회중, 집회, 모임이라는 뜻인데 이는 헬라 문화적인 표현으로 로마색이 짙은 라틴 문화권에서는 정치적인 오해받을 수 있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박영호). 

바울은 교회라는 단어 대신에 “모든 성도들과 감독들과 집사들”을 수신인으로 표현합니다. “모든 성도”에는 당시 사회적인 신분이나 계급을 초월하여 주인과 노예,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와 장애인 등 모든 사람을 포함하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교회는 처음부터 신분과 지위와 인종과 성별과 빈부를 포괄하는 평화와 평등 공동체였습니다. 오히려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들을 환영하고 품어주는 사랑의 공동체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복음과 사역에서 기원합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이 선포하신 천국 복음은 세상의 모든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의 기쁜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는 모든 사람을 환영하고 한 가족이 되는 교회로 성숙해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도 차별하지 않으며, 누구도 외면하지 않으며, 누구라도 존중받고 사랑받으며,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온전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교회로 성장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교회에 장애인들이 눈에 많이 띄는 것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또한, 근래에 우리 교회에 미얀마인들이 많이 보이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우리는 계속 깊어지고 넓어지고 뻗어가야 합니다.

바울은 빌립보의 모든 “성도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성도(聖徒)”라는 단어 자체가 복수 개념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가리켜 “성도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맞지 않아 보입니다. 그러면 한 개인을 표현하는 단어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성자(聖者)”입니다. 맞습니다. 우리 각자는 성자입니다. 우리가 성자이라니, 얼마나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이름입니까? 그러나 얼마나 부담스러운 이름입니까? 우리 모두 ‘나는 성자’라는 정체성을 가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교회에서 집사, 장로, 전도사, 권사, 목사 등으로 불립니다. 심지어 이것이 어떤 지위나 계급처럼 인식되어 있습니다. 권사가 집사보다 높은 것입니까? 목사가 전도사보다 높은 것입니까? 감독이 목사보다 높은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지위가 아니라 직분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이루기 위해 부르셔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세우신 직분입니다. 바울이 수신인을 말하면서 감독과 집사라고 한 것은 성도들보다 특별한 사람들로 부른 것이 아닙니다. 감독과 집사라는 명칭이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감독이나 집사라는 호칭과는 다른 의미입니다. 쉽게 번역한다면 “지도자들과 사역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지도자들과 집사들을 포함한 빌립보의 모든 성도”에게 편지를 쓴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를 부르는 어떤 이름보다 더 아름답고 가장 귀한 이름이 성도입니다. 의미상 우리 각자 개인은 성자이지만, 성경은 성도를 성자로 부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항상 ‘성도’입니다. 우리는 공동체로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공동체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는 바울이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고전 1:2)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우리가 성도가 된 것은 성도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1절) 성도가 되었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우리의 노력과 행위와는 아무런 상관 없이 예수님의 은혜를 통하여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와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를 성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서로 필요합니다. 서로 위로하고, 서로 격려하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섬깁니다. 자신이 동수교회의 성도인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 잊지 마십시오. 내가 동수교회의 성도인 것이 큰 기쁨이고 행복임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로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띠로 교회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맺은 관계가 얼마나 소중한지 과소평가 하지 마십시오.

은혜와 평화가 있기를

이제 바울은 인사말을 전합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2절) 당시 헬라 문화권에서 중요한 가치가 은혜였다면, 로마 제국은 평화를 중요한 가치로 여겼습니다. 그러니 바울은 인사말에서 당시 문화와 가치를 반영하면서 이것을 거룩한 성도의 인사말로 새롭게 만들었습니다. 은혜와 평화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주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평화와 은혜’가 아니라 ‘은혜와 평화’라는 단어의 순서에 주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은혜가 평화의 근원이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둘의 순서를 바꾼 적이 없습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복음에 담긴 진리를 표현하는 매우 중요한 단어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대속의 사랑을 믿는 자는 구원을 받고 의롭다 하심을 입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회복되고 세워집니다. 은혜는 하나님이 아무 대가 없이 거저 베풀어 주시는 구원의 선물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곳에 참 평화인 샬롬이 임합니다. 이 평화는 성도의 내면과 모든 관계에서 드러납니다. 평화는 은혜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은혜가 없다면 평화도 없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롬 5: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은혜 안에서 참 평화를 누립시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샬롬의 평화를 이루는 십자가의 사랑을 의지합시다. 평화의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허시고 기쁨의 평화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화평한 성도는 일상의 삶에서 평화를 가져오며, 평화를 세웁니다. 성도는 평화의 사도입니다. 은혜와 평화가 진정한 기쁨의 원천입니다. 

4. 다듬으심

1) 주일 예배를 통해 경험하고 감동받거나 느낀 것은 무엇인가요?

2) 바울은 자신을 “예수의 종”이라고 표현하며 자신은 예수에게 속하였고, 예수의 것이며, 오직 예수를 섬기며, 예수의 뜻을 위해 살고, 예수를 닮으려 함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의 종”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삶을 돌아보며 이야기 나눠봅시다.

3) 교회는 처음부터 신분과 지위와 인종과 성별과 빈부를 포괄하는 평화와 평등 공동체,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들을 환영하고 품어주는 사랑의 공동체였습니다. 나는 오늘 성숙한 성도, 교회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자유롭게 나눠봅시다.

4) 앞으로 한 주간 삶 속에서 말씀을 어떻게 적용할지 구체적으로 한 가지만 나눕니다.

5. 들어쓰심 

1)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기 위한 결단과 헌신의 기도하기

2) VIP(전도대상자), 개인, 가정, 교회, 선교, 나라를 위한 합심, 중보기도

6. ◾ 가 정 : 말씀나눔 ◾ 소그룹 : 말씀나눔/ 소식나눔/ 헌금찬송 250장/ 주기도문

7. 금주의 암송구절 : 금주의 암송구절을 함께 외웁니다.

 ◾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막 10:43-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