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환영과 찬양
◾ 기쁨으로 서로 환영하며 축복합니다. 잠시 교제의 시간을 가집니다.
◾ 찬송 33장 ◾ 복음송 너의 가는 길에 주의 평강 있으리
◾ 기도 맡은이 혹은 합심기도
2. 먼저오심
1) 지난 한 주간의 이야기(행복, 고마움, 힘듦)를 서로 나눕니다.
2) 지난 한 주간 어떤 기도를 했는지 서로 이야기합니다.
3. 만나주심
◾ 성경본문 : 빌립보서 2:5-11
이제 바울은 “겸손한 마음”의 본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합니다.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입니다.”(5절) 오늘 본문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복음 이야기가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의 사건을 선포하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구원을 받은 성도는 당연히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겸손의 본을 보여주셨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6절) “모습”이란 어떤 모양을 가리키는 단어이지만, 단순히 외적인 모양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본질을 뜻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셨다”라고 말합니다. “당연하게”라는 단어는 ‘탈취하거나 노획한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하나님과 본질상 같은 분이시기에 마음만 먹으면 동등함을 취할 수 있으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동등함을 탈취하지 않으시고 스스로 내려놓으신 것입니다. 죄의 경향, 교만의 모습은 탈취하는 것입니다. 교만에 빠진 인간은 남을 낫게 여기기보다는 끊임없이 욕망하고 탐욕 하며 탈취하는 일에 정신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교만과 헛된 영광에 빠진 세상의 풍조와 가치와는 정반대의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연한 것을 내려놓으심으로 탈취하지 않으시고, 스스로 자신을 낮추셨고 자기를 비하하셨고 자기를 희생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는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습니다.”(7절) 예수님의 자기 “비움”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는 핵심 개념입니다. 비움이 의미하는 것은 신성을 지니신 예수님이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으셨다는 뜻입니다. 그야말로 스스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셨습니다. 하나님으로 행세하지 않으시고 자신을 온전히 종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버리신 것이 예수님의 비움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비우신 예수님은 “종”이 되셨습니다. 노예가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노예로 태어나지 않으셨습니다. 평범한 유대인의 가정에 태어나셨지만, 예수님은 신성을 지니셨고, 어릴 때 랍비들과 토론할 정도로 지혜로우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스스로 노예가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신” 것(성육신) 자체가 노예가 되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습니다. 노예는 자신에 관해 아무것도 주장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자신의 권리를 자발적으로 포기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라는 말씀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품어야 하는 ‘겸손의 마음’은 단지 성도 개인의 마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공동체 안에서 성도 간의 관계에 초점을 둔 말씀으로 받아들인다면 영어 성경과 같이 “마음”을 “태도”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성도는 모든 인간관계에서, 공동체 생활에서 그리스도의 겸손의 태도로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 20:25-27)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며 스스로 섬김의 종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는 공동체, 곧 세상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진정한 교회, 진정한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모범을 배우고 따르며 오직 겸손과 섬김의 가치와 방식으로 움직이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온전한 겸손과 섬김은 곧 자신을 비움으로 가능합니다. 예수님처럼 스스로 자기 권리를 포기해야 가능합니다. 바울조차 자신이 당당히 누릴 권리를 포기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을 전하는 데에 따르는 나의 권리를 이용하지 않는다는 그 사실입니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몸이지만,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고전 9:18-19) 바울은 사도로서 마땅히 구할 권리를 내려놓았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자기 비움을 본받았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겸손을 자신의 목회 철학으로 삼았습니다.
성도가 살고, 교회가 살고, 공동체가 사명을 이룰 수 있는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저마다 가지고 있는 권리를 포기하고 내려놓는 것입니다. 권리를 내려놓을 때, 교회가 살아납니다. 교회에 생명력이 넘칩니다. 교회가 세상의 조직과 다른 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는 이렇게 하여 세상과 차별화됩니다. 교회는 이렇게 하여 세상에 소망이 됩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자기 권리만 주장한다면 거기에는 갈등과 긴장과 상처와 아픔이 있을 뿐입니다. 사실 자신의 권리를 포기할 때 가장 힘든 것은 그것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을 때입니다. 심지어는 오히려 나의 권리 포기를 이용해 누군가가 자기의 이득을 채우는 것을 볼 때입니다. 진실한 성도라면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주님을 본받고 주님을 따르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님의 마음으로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맙시다. 지쳐서 넘어지지 아니하면, 때가 이를 때에 거두게 될 것입니다.”(갈 6:9)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모든 권리를 스스로 포기하신 예수님은 자기 결정권이 전혀 없는 종이 되셔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그 순종이 죽음의 길이라 하더라도 자신을 비우신 예수님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묵묵히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순종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8절) “낮춘다”는 단어는 ‘비하하고 비굴하게 만든다’라는 뜻입니다. 바울 당시 겸손은 결코 미덕이 아니었습니다. 자기를 비굴하게 낮추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종이 되신 예수님의 거룩한 순종의 열매입니다. 예수님의 겸손은 십자가를 향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점점 낮아지신 모습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낮아지심의 끝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본체이신 예수님은 ➡ 하나님과 동등함을 취하지 않으시고 ➡ 자기를 비우셨습니다. ➡ 종의 모습을 취하시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며 ➡ 자기를 낮추시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자기를 부정하고 내려놓으신 예수님은 결국 대속의 제물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이야기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겸손의 최저점인 정점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섬김의 정점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자기 비움의 정점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십자가는 가장 비참하고 처참하고 저주스러운 죽음이 십자가였습니다. 하늘의 왕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기까지 낮아지심은 오직 한 가지 때문입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의 대속물이 되기 위함, 곧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이 십자가를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 부끄럽고 비천한 십자가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되었습니다. 이 십자가가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이 되었고 기쁨이 되었고 생명이 되었고 자랑이 되었습니다(갈 6:14).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십자가 없이는 자신을 설명할 수 없고, 십자가 없이는 존재 이유와 목적을 말할 수 없습니다. 신분 상승과 부와 권력을 향하는 경쟁과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하향 지향의 삶을 노래하는 것이 그리스도 찬가의 핵심 주제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꿈꾸어야 할 삶이며 방향입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를 거슬러 그리스도의 겸손과 자기 포기의 가치로 사는 것이 우리의 길입니다.
예수님이 온전한 순종으로 십자가를 지셨을 때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9절) 자기를 낮추신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지극히 높이신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침묵하시면서 아들의 수난과 수치와 모욕을 그대로 함께 겪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리심은 최고의 들리심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높이셔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뛰어난 이름”은 만물의 창조주 하나님의 이름이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주님(아도나이)으로 불리셨듯이, 예수님을 주님(퀴리오스)로 부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주라는 이름을 주심으로 예수님을 최고로 존엄한 분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높이신 결과는 무엇입니까? 바울은 말씀합니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10-11절)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예배의 행위를 의미합니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최고로 높이 들으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고백하며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우주가 경배하는 것입니다. 이 경배는 그리스도를 높이신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경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과 자기 비움의 십자가는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과 악의 세력까지 물리치셨습니다. 권력과 폭력으로 다스리는 세상에서, 십자가의 겸손과 무력함으로 모든 권세를 물리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낮아지심으로 죄와 사망의 권세를 물리치고 생명과 구원의 주가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비천한 십자가에서 영광의 하늘로 높이시고 최고의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는 우리를 다스리시는 왕이 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온 마음을 다해 그리스도 찬가를 부르며, 승리와 기쁨의 노래로 하나님을 경배하며 영광을 돌립시다. 불의의 권력이 판을 치며, 악한 짐승의 통치가 맹위를 떨친다 해도, 죄의 세력이 몰려오고 장차 다가올 환란과 고난을 맞서야 하는 상황에서도, 우리는 낮아지시고 자신을 버리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승리하신 부활의 주님을 경배합시다. 주님을 경배하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오직 그리스도를 본받고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4. 다듬으심
1) 주일 예배를 통해 경험하고 감동받거나 느낀 것은 무엇인가요?
2) 오늘 본문은 성도는 모든 인간계, 공동체 생활에서 그리스도의 겸손의 태도로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나의 권리를 포기하고 내려놓는데 어려움과 장애물은 무엇인지 자유롭게 나눠봅시다.
3) 신분 상승과 부와 권력을 향하는 경쟁과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하향 지향의 삶을 노래하는 것이 그리스도 찬가의 핵심 주제이며, 우리가 꿈꾸어야 할 삶이며 방향입니다. 우리는 바른 방향으로 살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4) 앞으로 한 주간 삶 속에서 말씀을 어떻게 적용할지 구체적으로 한 가지만 나눕니다.
5. 들어쓰심
1)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기 위한 결단과 헌신의 기도하기
2) VIP(전도대상자), 개인, 가정, 교회, 선교, 나라를 위한 합심, 중보기도
6. ◾ 가 정 : 말씀나눔
◾ 소그룹 : 말씀나눔/ 소식나눔/ 헌금찬송 455장/ 주기도문
7. 금주의 암송구절 : 금주의 암송구절을 함께 외웁니다.
◾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