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212 동수교회 2부 예배 실황 영상 "마스크"

작성 동수교회
날짜 2023-02-12
설교한 날
2023/02/12 일
성경 본문
마태복음 5:21-30
설교
전종배 목사

<온라인 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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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크(마태복음 5:21-30)

 

1. 환영과 찬양

   ◾ 기쁨으로 서로 환영하며 축복합니다. 잠시 교제의 시간을 가집니다. 

   ◾ 찬송 40장    ◾ 복음송  오소서 진리의 성령님

   ◾ 기도  맡은이 혹은 합심기도

 

2. 먼저오심 

   1) 지난 한 주간의 이야기(행복, 고마움, 힘듦)를 서로 나눕니다.

   2) 지난 한 주간 어떤 기도를 했는지 서로 이야기합니다.

 

3. 만나주심 

   ◾ 성경본문 : 마태복음 5:21-30

 

 오늘 말씀에는 율법을 완전하게 하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구체적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주제는 살인과 간음에 대한 문제입니다. 

 먼저 예수님은 십계명 중 6계명인 ‘살인하지 말라’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전통적으로 ‘살인하지 말라’라는 계명은 매우 엄중한 계명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주인이신데, 그런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파괴하는 것은 큰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생명을 파괴하지 말라는 금지 명령 속에는 ‘생명을 존중하라’라는 적극적인 행동 명령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힘이 있던 사람들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기는 했지만, 그 계명을 악용해서 죽지 않을 만큼의 폭력을 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으로 살인 금지 규정을 피한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예수님은 오늘 말씀에서 새로운 법을 말씀하셨습니다. “형제에게 노하는 자”도 살인에 못지않은 죄를 범한 것이라는, 상당히 파격적인 해석을 내놓으신 겁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분노뿐 만이 아니라 모독과 욕설이 담고 있는, 인간의 ‘내면적 감정’과 ‘언어의 폭력’도 가시적인 폭력에 상응하는 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분노와 모독과 욕설을 살인죄와 견줄 만큼 엄중한 죄로 보시는 이유는, 팔복의 말씀에서 예수님이 선포하셨던 “하늘나라”는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갈 ‘나라’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자들로, 마땅히 형제자매들 간에도 화목해야 했습니다. 단순히 화목하기 위해 물리적 살인을 하지 않으면 된다는 식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형제자매 사이의 화목을 이뤄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러한 화목을 방해하는 마음속의 분노와 그로 인한 모독, 그리고 욕설은 엄중한 죄에 해당되었던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형제자매를 향해 분노하고 그들을 경멸한다면, 그 사람은 결코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에 대해 이어서 언급하셨습니다(23-24). 그곳에서 예수님은 형제에게 분노와 경멸의 언어를 쏟아낸 뒤 원망을 샀다면, 그 형제와 화목을 이룬 뒤에 제단 앞에 나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과의 화목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언제 화목해야 하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 25절과 26절에서는 화해의 시급성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그리고 있는 상황을 우리 식으로 말하면, 소송으로 법정에 가는 중인 겁니다. 함께 법정을 향해 가는 길, 바로 이 길은 화해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뜻합니다. 그래서 25절에서는 급히 사화하라고, 말하는 것이고, 26절은 그렇지 못할 경우 경험하게 될 손해에 대해 말하는 겁니다.

 이어서 27절로 30절 말씀에는 간음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것은 십계명 중 7계명에 해당됩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간음’은 합법적인 결혼의 울타리를 벗어난 성관계를 의미했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마음에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것 자체가 간음이라고 확장해서 해석하셨습니다. 꼭 행동의 결과로 드러난 간음만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온 음욕 자체가 간음이라고 보신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일까요? 겉으로 드러나는 범죄는 결과일 뿐이고, 그 결과의 원인이 되는 것은 바로 ‘마음의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당시 율법의 범위를 훨씬 뛰어넘는 내면의 질서를 새롭게 선포하셨습니다. 

 29절로 30절에서, 눈을 빼어 내버리고 손을 찍어 버리라는 이 말씀은 어떻게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까요? 이 말씀은 하늘나라를 사는 제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삶의 방식이 있다면, 그것을 과감하게 잘라버려야 함을 강조한 표현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이 지켰던 율법의 행위는 매우 엄격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히 율법을 지킴으로 사람이 의로워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율법을 지키는 행위가 사람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내면화하고, 그것을 삶으로 드러내야, 비로소 거룩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룩하지 못한 마음을 품게 했던 우리 안의 시선과 거룩하지 못한 삶으로서의 손, 바로 우리 행실은 과감히 버려 버리고, 내면의 거룩함으로 하늘나라의 신앙윤리를 따르라는 주님의 가르침이 강조된 표현으로, 우리는 이 말씀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당시 이 말씀을 전해 들었을 많은 이스라엘 백성 중,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과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모르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이 이 계명을 언급하시며 많은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던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정한 율법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고, 또 그것을 진정으로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있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의 문자적 의미를 넘어서지 못했고, 기계적인 순종에만 머물러서 타인의 인격과 존엄성을 쉽게 파괴했습니다. 한 예로, 바리새인들은 십계명 외의 구전 율법까지도 잘 지켰다며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겼지만, 생업에 쫓기는 일반 사람들은 그들이 지키던 강도 높은 율법을 절대 지킬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죄인으로 치부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면의 질서 없이 행위로만 의롭다고 여기던 위선적인 바리새인들을 비판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우리 안에도 이런 위선이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해볼 수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야 하는 게 우리인데, 그렇게 살지 못할 때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교회 안에 이런 위선이 있을 수 있는 것일까요?

 사실 교회에 다닌다고 다 진짜 그리스도인은 아니기 때문에 이런 위선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주변에는 가족들이나 직장 상사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억지로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 외에도 사실 모든 기독교인들은 다 위선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부르신 온전한 삶을 살아야 하지만, 매일 죄를 짓는 죄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우리는 위선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경건하게 살고자 노력해도 위선자라 불릴 위험에서 벗어날 순 없다는 것입니다. 분명 나아지는 부분이 있다고 해도 결국 계속 넘어지는 게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만나는 모든 사람을 위선자로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바리새인의 위선에 집중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8장 10절로 14절 말씀을 보면 그 이유를 우리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누가복음 18:10-14>

 

 바리새인과 세리는 모두 위선자의 범주에 해당됩니다. 하지만 이 둘의 차이는, 스스로를 죄인으로 고백하느냐에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세리는 죄인이기에 주님께 고개 숙일 수밖에 없었고, 죄인이기에 주님의 도움을 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병원에 갔을 때, 그곳에 있는 환자를 보고 놀라지는 않습니다. 병원은 병을 고치려는 환자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모두 영적으로 중병에 걸려있습니다. 교회는 상처 입고 다친 사람이 예수님의 은혜로 천천히 회복되는 은혜를 경험하는 곳입니다. 그러니 교회에도 위선자는 있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위선적인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율법의 정신을 보여주시고, 또 행하셨습니다. 비록 위선이라는 마스크를 쓰고 부족한 자신의 모습을 가려왔던 우리를 벌하지 않으셨고, 우리를 기다려 주셨습니다. 또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성경에는 그런 하나님의 은혜가 곳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죽어야 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죽이지 않으시고 가죽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야곱은 탐욕으로 아버지와 형, 그리고 삼촌을 속이며 살았지만, 하나님의 그의 환도 뼈를 치면서까지 그의 옛사람을 죽이시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새롭게 빚어가셨습니다. 이게 바로 우리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몇 년간 우리는 마스크를 쓰는 것에 너무 익숙해졌습니다. 마스크는 지난날 우리를 지켜주는 도구가 되었지만, 이 마스크는 우리의 진실한 얼굴을 가려왔습니다. 말씀을 대하는 우리의 모습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고, 그것으로 우리 자신을 반추하기보다는, 때때로 바리새인처럼 말씀으로 다른 누군가를 정죄하고, 그것으로 스스로 위안을 얻으려 할 때가 많았습니다. 더 이상 말씀은 문자적으로, 눈과 입으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가슴과 몸으로. 말씀 신앙이 억지 믿음이 아닌, 감동에 의한 실천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가식적인 신앙의 위선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내가 부족했음을, 내가 죄인이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은 우리의 빈 마음에 찾아오시고, 우리로 진실한 삶을 살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바라기는 이 한주, 우리의 위선을 벗어버리고, 솔직하고 진실한 얼굴로 주님을 대면하며, 더 나아가 우리 옆의 형제자매를 대면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4. 다듬으심

   1) 주일 예배를 통해 경험하고 감동받거나 느낀 것은 무엇인가요?

   2) 나에게 보이는 위선의 모습이 있나요? 자유롭게 나눠봅시다.

   3) 오늘의 말씀이 나에게 실천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4) 앞으로 한 주간 삶 속에서 말씀을 어떻게 적용할지 구체적으로 한 가지만 나눕니다.

 

5. 들어쓰심 

   1)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기 위한 결단과 헌신의 기도하기

   2) VIP(전도대상자), 개인, 가정, 교회, 선교, 나라를 위한 합심중보기도

 

6. ◾ 가정 : 말씀나눔   ◾ 소그룹 : 말씀나눔/ 소식나눔/ 헌금찬송 250장/ 주기도문

 

7. 금주의 암송구절 : 금주의 암송구절을 함께 외웁니다. 
  ◾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원이시오.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시편 62:5-6)